에리히 루덴도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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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1865년 폴란드 포즈난에서 태어난 프로이센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 참모차장으로 활약하며 독일을 사실상 지배하는 군사 독재자가 되었다. 그는 1914년 탄넨베르크 전투 승리를 이끌었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등 주요 정책 결정에 관여했다. 1918년 독일의 춘계 공세 실패 이후 권력을 잃고 스웨덴으로 망명했으며, 이후 극우 정치에 참여하여 아돌프 히틀러와 협력했다. 그는 나치당의 뮌헨 폭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했고, 1925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루덴도르프는 반유대주의적 음모론을 주장하며 저술 활동을 펼쳤으며, 1937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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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루덴도르프 | |
---|---|
기본 정보 | |
이름 | 에리히 프리드리히 빌헬름 루덴도르프 |
로마자 표기 | Erich Friedrich Wilhelm Ludendorff |
출생일 | 1865년 4월 9일 |
출생지 | [[File:Flag of Germany (3-2 aspect ratio).svg|border|25px]] 독일 제국 [[File:Flagge Preußen - Provinz Posen.svg|border|25px]] 폴란드 크루셰브니아 (현 비엘코폴스카주) |
사망일 | 1937년 12월 20일 |
사망지 | 나치 독일 뮌헨 |
![]() | |
정치 경력 | |
직책 | [[File:Flag of Germany (3-2 aspect ratio).svg|border|24px]] 독일 국회 국회의원 |
소속 정당 | [[File:NSDAP Hakenkreuz.svg|25px]]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 [[File:Flag of Germany (1867–1918).svg|border|25px]] 독일 민족자유당 |
선출 방식 | 전국구 명부 |
임기 시작 | 1924년 5월 4일 |
임기 종료 | 1928년 6월 13일 |
군사 경력 | |
소속 | [[File:War Ensign of Germany (1903-1918).svg|border|25px]] 독일 제국 육군 [[File:War Ensign of Prussia (1816).svg|border|25px]] 프로이센 육군 |
복무 기간 | 1883년–1918년 |
최종 계급 | 독일 제국 육군 보병대장 |
참전 전투 |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의 동프로이센 침공 탄넨베르크 전투 제1차 마수리아 호수 전투 비슬라 강 전투 우치 전투 마수리아 호수 겨울 전투 후민-볼리무프 전투 욤자 전투 독일 여름 공세 (1915) 부크-나레프 공세 노보게오르기예프스크 포위전 리가-샤울렌 공세 빌노-드빈스크 공세 나로치 호수 바라노비치 공세 브루실로프 공세 제2차 솜므 전투 독일 봄 공세 제2차 마른 전투 캅 폭동 뮌헨 폭동 |
육군 참모차장 (제1 병참 총감) | [[File:War Ensign of Prussia (1816).svg|border|25px]] 프로이센 육군 육군 참모본부 차장 |
임기 시작 | 1916년 8월 29일 |
임기 종료 | 1918년 10월 26일 |
참모총장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임기 시작 | 1923년 9월 2일 |
임기 종료 | 1923년 11월 9일 |
가족 | |
배우자 | 마르가레테 슈미트 (1909년 결혼, 1925년 이혼) 마틸데 폰 켐니츠 (1925년 결혼) |
친척 | 한스 루덴도르프 (형제) 하인츠 페르네 (의붓아들) |
훈장 | |
주요 훈장 | 철십자 훈장 1급 막스 요제프 군사훈장 대십자 호엔촐레른 가 훈장 대사령관 2급 1870년형 철십자장 1급 1870년형 철십자장 대십자 철십자장 장크트 하인리히 군사훈장 무공훈장 (뷔르템베르크) 올덴부르크 가 페터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공작 공훈장 무공훈장 (오스트리아-헝가리) 무공포장 (오스트리아-헝가리) |
기타 |
2. 어린 시절
포젠주[168] 포젠(지금의 포즈난) 근처 크루스제브니아에서 포메라니아 상인 가문 출신인 아우구스트 빌헬름 루덴도르프의 여섯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클라라 지네테 헨리에테 폰 템펠호프이며, 가난한 귀족 출신이었다.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외할머니 지네테 빌헬미네 폰 짐보브스카는 독일계 폴란드인 지주 계급 출신으로, 실레지아 공작과 브란덴부르크 선거후의 먼 후손이었다. 루덴도르프는 작은 가족 농장에서 자라면서 안정되고 편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회고하며, 외삼촌에게서 초등 교육을 받았고 수학에 열정을 가졌다.[2][3]
1885년, 루덴도르프는 베젤에 주둔하고 있던 57 보병연대에 소위로 입대했다. 이후 8년 동안 킬과 빌헬름스하펜의 2해군보병대대와 프랑크푸르트에 주둔한 8근위척탄병연대에서 중위로 근무했다. 그의 복무 기록은 매우 우수했다. 1893년, 루덴도르프는 메켈 장군의 추천으로 전쟁대학에 입학했고, 1894년에 장군참모가 되었다. 1902년부터 1904년까지 5군단 사령부에서 수석 참모를 지냈고, 1905년 폰 슐리펜 휘하에서 베를린 참모본부 2과로 부임하여 1913년까지 기동과를 책임졌다. 1911년에는 중령이 되었다.
뛰어난 직업 윤리와 수학 실력 덕분에 플뢴의 수도원 학교에 입학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 시험을 통과하여 동갑내기들보다 2년 월반, 이후 줄곧 반에서 1등을 차지했다. 하인츠 구데리안도 같은 수도원 학교를 다녔으며, 이 학교는 많은 우수한 독일 장교를 배출했다.[5]
3. 군 경력
루덴도르프는 슐리펜 계획 수립에 참여하여 벨기에 리에주 주변 요새를 평가했다. 1912년 사회민주당이 선거에서 다수당이 되었으나, 이들은 군비 확충보다 독일 제국 해군에 예산을 집중했다. 루덴도르프는 퇴역 장군 카임을 통해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결국 전쟁성은 그의 선동에 대한 정치적 압력에 굴복, 1913년 1월 루덴도르프를 참모본부에서 해임하고 뒤셀도르프 주둔 39 저지라인 퓨질리어 연대 연대장으로 임명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바바라 터치맨[169]은 저서 《8월의 포성]》에서 루덴도르프를 슐리펜의 수제자로 묘사했다. 1910년, 45세의 루덴도르프는 마르가레테 슈미트와 결혼했다. 1911년
3. 1. 군에서의 진급
진급일 | 계급 |
---|---|
1882년 4월 15일 | 소위 |
1890년 7월 1일 | 중위 |
1895년 3월 | 대위 |
1902년 7월 1일 | 소좌 |
1908년 4월 1일 | 중좌 |
1913년 | 대좌 |
1914년 4월 22일 | 소장 |
1914년 11월 27일 | 중장 |
1916년 8월 29일 | 보병대장 |
3. 2.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루덴도르프는 카를 폰 뷜로브 장군 휘하의 독일 제2군 부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임무는 리에주 주변 요새를 조사한 경험 때문이었다. 슐리펜 계획에 따라 독일군 공격이 시작되었고, 루덴도르프는 리에주 전투에서 여단장이 전사하자 14여단을 지휘하여 리에주를 함락시키고 빌헬름 2세로부터 푸어 르 메리트 훈장을 받으며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한편, 러시아는 예상보다 빠르게 군대를 동원하여 동프로이센의 독일군이 후퇴하고 있었다. 루덴도르프는 벨기에에서 동부 전선 8군 참모장으로 부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함께 타넨베르크 전투와 마주리안 호수 전투를 성공시킨 작전 계획을 수립했으며, 이 과정에서 막스 호프만 중령의 역할도 컸다. 우치 전투 후에는 중장으로 승진했다.
1916년 8월, 베르됭 전투 실패로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사임하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참모총장이 되자, 루덴도르프는 공동 책임을 조건으로 참모차장(Generalquartiermeister)에 임명되어 독일의 전쟁 수행을 이끌게 되었다. 이들은 3차 최고 지휘부(Third Supreme Command)를 형성했다.[172] 1916년 가을 이후,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독일을 지배하는 군사 독재자가 되었다.[173] 이들은 힌덴부르크 프로그램과 애국 봉사 법안(Vaternische Hilfsdientde)으로 독일 전체를 통제하려 했으며, 황제도 이들에게 모든 주요 사안을 결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했다.[174] 루덴도르프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입안하여 1917년 미국의 대독 선전포고를 야기했고, 동유럽에서 거대한 영토를 병합하고 식민지화할 것을 계획했다.[176]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으로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탈하자,[177] 루덴도르프는 볼셰비키 지도부와의 정전 회담에 참가하여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했다. 그해 봄, 미국군이 전선에 배치되기 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하엘 작전, 게오르게테 작전, 블뤼허 작전 등 독일의 마지막 춘계 공세를 계획하고 지휘했다.
1918년 독일군의 춘계 공세는 초기에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점차 한계를 드러냈고, 2차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은 미군이 증원된 연합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다. 1918년 8월 8일, 루덴도르프는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결론내리고, 휴전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현 위치를 사수할 것을 명령했지만, 정신 공황 상태를 보이기도 했다.[178]
1918년 9월 29일, 루덴도르프는 패전 책임을 문민 정부에 씌우고 독일 군부를 지키고자, 제국의회 다수파를 내각에 입각시켜 민간 정부를 수립해야 우드로 윌슨이 휴전 제안에 동의할 것이라고 제안하여, 독일에서 "위로부터 혁명"이 시작되었다.[181] 그는 미국 정부와 직접 협상을 시도했고, 1918년 10월 1일, 바덴의 막스 공에게 조각을 위임하여 10월 5일부터 새 정부를 출범시켰다.[185]
그러나 1918년 10월 초, 새 정부의 협상 내용을 알고 좌절한 루덴도르프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휴전 협정 내용을 비난하며, 10월 중순에 방어에 유리한 겨울까지 전선을 유지해야 한다고 결정했지만, 민간 정부는 협상을 계속했다.
결국 막스 공은 황제에게 자신과 루덴도르프 중 한 명을 선택하라고 요구했고, 황제는 막스 공을 선택했다. 루덴도르프는 10월 26일 사직서를 제출했다. 꽁피에뉴 숲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루덴도르프는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3. 2. 1. 전쟁 초반 - 타넨베르크 전투
1914년 4월, 루덴도르프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스트라스부르에 주둔한 85보병여단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카를 폰 뷜로브 장군 휘하 독일 2군 부참모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벨기에 리에주 주변 요새 조사 경험 덕분이었다.슐리펜 계획에 따라 독일군 공격이 시작되면서, 루덴도르프는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리에주 전투에서 독일군은 벨기에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8월 5일, 루덴도르프는 전사한 여단장을 대신하여 14여단을 지휘, 리에주를 고립시키고 중포 지원을 요청했다. 8월 16일, 리에주 주변 모든 요새를 점령한 후, 빌헬름 2세로부터 푸어 르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한편, 러시아는 예상보다 빠르게 군대를 동원하고 있었다. 동프로이센의 독일군은 러시아군이 쾨니히스베르크[171]로 진격하자 후퇴했다. 루덴도르프는 벨기에에서 갑작스럽게 동부 전선 8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루덴도르프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함께 동프로이센을 포기하는 대신, 타넨베르크 전투와 마주리안 호수 전투를 성공시킨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과정에서 막스 호프만 중령의 역할도 컸다. 1914년 11월 우치 전투 후, 루덴도르프는 중장으로 승진했다.
동부 전선에서 독일 8군이 패배하자, 루덴도르프 소장이 동부 전선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제8군 사령관에는 퇴역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장이 취임했다.[96] 두 사람은 제1차 세계 대전 내내 콤비를 이루었지만, 루덴도르프가 실질적인 두뇌 역할을 했다.[96]
1914년 8월 23일, 루덴도르프는 마리엔부르크의 제8군 사령부에 도착, 막스 호프만 중령과 함께 반격 작전을 지휘했다. 독일 제8군은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 제2군을 포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97] 이후, 독일군은 러시아 제1군에게도 공격을 개시, 큰 피해를 입혔다.[97]
3. 2. 2. 3차 최고 지휘부
1916년 8월,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베르됭 전투 실패로 사임하면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신임 참모총장이 되었다. 루덴도르프는 모든 명령은 두 사람이 내린다는 조건으로 참모차장(Generalquartiermeister)에 임명되어 독일의 전쟁 수행을 이끌게 되었다. 이들은 함께 이른바 3차 최고 지휘부(Third Supreme Command)를 형성했다.[172]1916년 가을 이후,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사실상 독일을 지배하는 군사 독재자가 되었다.[173] 이들은 힌덴부르크 프로그램과 애국 봉사 법안(Vaternische Hilfsdientde)으로 독일 전체를 통제하려 했으며, 황제도 이들에게 모든 주요 사안을 결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했다.[174] 루덴도르프의 직위는 참모차장에 불과했지만, 힌덴부르크를 제치고 국사 및 정치 부분에 대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제국 정부 각료를 루덴도르프가 경질하는 일도 있었다.[175]
루덴도르프는 영국의 해상봉쇄를 깨기 위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입안했는데, 이 작전은 결국 1917년 3월, 미국이 대독 선전포고를 하게 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루덴도르프는 승리한 독일 제국에 의해 동유럽에서 거대한 영토를 병합하고 식민지화할 것을 계획했으며, 폴란드 국경 강탈(Polish Border Strip)의 주요 후원자이기도 했다.[176]
3. 2. 3. 독일을 지배하다
1916년 가을부터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독일을 지배하는 군사 독재자가 되었다.[173]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힌덴부르크 프로그램과 애국 봉사 법안(Vaternische Hilfsdientde)으로 독일 전체를 통제하려 했으며, 황제도 이들에게 모든 주요 사안을 결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했다.[174] 루덴도르프의 직위는 참모차장(Generalquartiermeister)에 불과했지만, 힌덴부르크를 제치고 국사 및 정치 부분에 대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제국 정부 각료를 루덴도르프가 경질하는 일도 있었다.[175]루덴도르프는 영국의 해상봉쇄를 깨기 위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입안했는데, 결국 이 작전은 1917년 3월, 미국이 대독 선전포고를 하게 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루덴도르프는 승리한 독일 제국에 의해 동유럽에서 거대한 영토를 병합하고 식민지화할 것을 계획했으며, 폴란드 국경 강탈(Polish Border Strip)의 주요 후원자이기도 했다.[176]
러시아가 1917년에 2월 혁명과 10월 혁명으로 전쟁에서 빠지자[177] 루덴도르프는 독일과 새로운 볼세비키 지도부와 정전 회담에 참가했다. 수많은 협의를 거친 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1918년 3월에 체결했다. 그 해 봄, 루덴도르프는 서부 전선에서 미하엘 작전(Operation Michael), 게오르게테 작전(Operation Georgette), 블뤼허 작전 등 미국군이 전선에 배치되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고 독일의 마지막 춘계 공세를 계획하고 지휘했다. 1918년 독일군의 춘계 공세는 전쟁을 마무리할 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이 붕괴하면서 루덴도르프의 전시 지도력은 점차 빛을 잃어갔다.
공세는 3월 21일에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공세 초기에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점차 한계를 드러냈다. 결국 2차 마른 전투(1918년 7월 15일 ~ 8월 7일)에서 독일군은 미군이 증원된 연합군의 진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1918년 8월 8일, 루덴도르프는 전쟁을 이제는 끝내야 한다고 결론냈다. 그는 회고록에서 8월 8일을 "독일군 암흑의 날"이라고 썼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휴전협상을 진행할 동안 현 위치를 사수할 것을 명령했다. 루덴도르프는 때때로 눈물을 보이며 정신 공황 상태를 보였고, 그를 걱정하던 참모들은 정신과 전문의를 부르기도 했다.[178]
9월 29일, 루덴도르프는 매우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이날 루덴도르프가 내린 결정은 그 후 몇 년간 국가 기밀이었다.[180] 그날 새벽 루덴도르프는 제국 수상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Georg von Hertling)과 외무대신 파울 폰 힌체(Paul von Hintze)를 벨기에 슈파(Spa)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 사령부로 불렀다. 힌체는 루덴도르프에게 제국의회 다수파인 사회민주당, 가톨릭중앙당, 진보당을 내각에 입각시켜 민간 정부를 수립해야 우드로 윌슨이 휴전 제안에 동의할 것이라고 제안했고, 루덴도르프가 동의했다.[181] 루덴도르프는 패전 책임을 문민 정부에 씌우고, 독일 군부를 지키고자 했다. 독일군은 계속 승리하고 있었는데 좌익이 독일군을 배신하고 항복했다는 이른바 "등 뒤의 비수 전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9월 29일은 독일에서 "위로부터 혁명"이 시작된 날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군부는 상처를 입지 않고 살아 남아 항복한 문민정부를 경질할 수 있다고 루덴도르프는 계산했다.[182] 루덴도르프는 이 계획을 9월 27일에 세웠고, 다음 날 힌덴부르크와 제국 수상 및 외무대신으로부터 동의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황제로부터 윤허도 받아냈다.[182]
프로이센 왕국은 전쟁 전에 누렸던 왕권을 회복하고[183] 빌헬름 2세 황제가 퇴임할 때까지 왕권을 유지했다. 루덴도르프는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더 나은 조건으로 협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미국 정부와 직접 협상을 시도했다. 그는 새로 수립할 문민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더 나은 평화 조건을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다.[184] 10월 1일, 루덴도르프는 헤르틀링을 사임시키고 바덴의 막스 공(Max von Baden)에게 조각을 위임했다. 막스 공은 정당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자유주의 성향의 귀족이었고, 루덴도르프에게 계속 반대했던 사람이었다. 막스 공은 휴전 협상안에 반대했으나 10월 4일, 결국 루덴도르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185] 막스 대공은 내각에 독일 사회민주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영입하고 10월 5일부터 새 정부를 출범시켰다.[185] 하지만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의회 세력들이 그간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전쟁 중후반기부터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의회 다수파들은 헌법 개정을 주 내용으로 하는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 붕괴가 분명해진 시점에서 독일군을 총지휘하고 있던 루덴도르프가 패전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이 11월 혁명 이전에 이뤄진 위로부터 혁명이었다.[186]
그러나 루덴도르프는 10월 초에 새 정부가 협상하고 있던 내용을 알고 좌절에 빠졌다. 10월 2일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통첩을 막스 공에게 보냈고, 신임 수상 막스 공은 미국에 휴전 협상을 제의했다. 그러나 우드로 윌슨은 "독일의 군사 권력자나 군국주의 독재자와 교섭해야 한다면 독일과 강화 조건에 관해 토의할 수 없으며 무조건 항복해야 한다"고 회답했다.[186] 빌헬름 2세 황제가 퇴위해야 협상을 할 것이라는 퇴위 요구였다. 윌슨은 10월 8일부터 23일까지 세 번 최후 통첩을 보냈는데, 세 번째는 황제 퇴위를 거의 분명하게 요구했다.[187] 독일 국내 여론도 완전히 갈라지기 시작했고, 승전 선전에만 익숙했던 시민들은 갑작스러운 휴전 협상 소식에 "배반당했다"라며 울분을 토했다.[187] 루덴도르프는 한 달 전과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명예로운 평화를 기대할 수 없었던 루덴도르프는 새 민간 정부를 다시 장악하기 위해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굴욕스러운 휴전 협정 내용을 비난했다. 루덴도르프는 10월 중순에 방어에 유리한 겨울까지 전선을 유지해야 한다고 결정했지만, 민간 정부는 협상을 계속했다.
문민 정부는 자신들이 패전의 책임을 쓰기로 결심했다. 루덴도르프가 의도했던 바대로 이런 굴욕 자세에 대하여 군부로부터 고발을 당할 수 있었다.[188] 루덴도르프는 이러한 문민 정부에 등을 돌려 윌슨이 마지막 통첩을 보낸 다음 날인 10월 24일 계속 저항할 것임을 군명으로 밝혔다.[188] 상황은 루덴도르프와 막스 대공의 문민 정부 사이 대결로 비화되었다. 이보다 1주일 앞선 10월 17일 루덴도르프도 출석한 내각 회의에서 막스 공은 이렇게 얘기했다.
> 루덴도르프는 사람을 신용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 루덴도르프 장군은 휴전 제안과 세계와 독일에 대한 그 파괴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적의 공세와 독일군의 사기 악화의 책임을 휴전 교섭에 뒤집어씌웠다.[188]
막스 공은 황제에게 자신과 루덴도르프 두 사람 중에서 1명을 선택하라고 요구했다. 황제는 막스 공을 선택했다. 루덴도르프는 10월 26일, 황제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루덴도르프가 지난 2년간 휘둘렀던 권력의 기반은, 그가 승리를 보장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승리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자 루덴도르프는 더 이상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9월 29일 이전에는 황제와 충돌했을 때 루덴도르프는 사직서로 황제를 협박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 그래, 그럼 그만두게" 같은 대답을 듣는 처지가 되었다.[188] 힌덴부르크도 사직할 것이라고 루덴도르프는 얘기했지만, 황제와 힌덴부르크의 생각은 달랐다. 황제는 힌덴부르크에 "유임하라"고 얘기했고, 힌덴부르크는 이를 받아들였다. 루덴도르프는 힌덴부르크가 자신을 버렸다고 비난했다. 참모본부로 돌아갈때 힌덴부르크가 루덴도르프에게 같이 차를 탈 것을 권했지만, 루덴도르프는 이를 거절했다.[189]
꽁피에뉴 숲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루덴도르프는 독일을 떠나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3. 2. 4. 루덴도르프의 몰락과 위로부터 혁명
1916년 가을 이후, 루덴도르프는 হিন덴부르크와 함께 독일을 지배하는 군사 독재자가 되었다.[173] 이들은 힌덴부르크 프로그램과 애국 봉사 법안으로 독일 전체를 통제하려 했으며, 황제도 이들에게 모든 주요 사안을 결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했다.[174] 루덴도르프는 참모차장에 불과했지만, 힌덴부르크를 제치고 국사 및 정치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으며, 제국 정부 각료를 경질하기도 했다.[175]루덴도르프는 영국의 해상봉쇄를 깨기 위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입안했는데, 이는 1917년 3월, 미국의 대독 선전포고를 야기했다. 그는 독일 제국이 동유럽의 거대한 영토를 병합하고 식민지화할 것을 계획했으며, 폴란드 국경 강탈의 주요 후원자였다.[176]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으로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탈하자,[177] 루덴도르프는 독일과 볼셰비키 지도부와의 정전 회담에 참가했다.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해 봄, 루덴도르프는 미국군이 전선에 배치되기 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하엘 작전, 게오르게테 작전, 블뤼허 작전 등 독일의 마지막 춘계 공세를 계획하고 지휘했다.
1918년 독일군의 춘계 공세는 전쟁을 마무리할 목적이었지만,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이 붕괴하면서 루덴도르프의 전시 지도력은 점차 빛을 잃어갔다. 공세는 3월 21일에 시작되어 초기에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점차 한계를 드러냈다. 2차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은 미군이 증원된 연합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다. 1918년 8월 8일, 루덴도르프는 전쟁을 이제는 끝내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그는 회고록에서 8월 8일을 "독일군 암흑의 날"이라고 썼다. 그는 휴전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현 위치를 사수할 것을 명령했지만, 정신 공황 상태를 보여 정신과 전문의를 부르기도 했다.[178]
1918년 9월 29일, 루덴도르프는 제국 수상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과 외무대신 파울 폰 힌체를 벨기에 슈파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 사령부로 불렀다. 힌체는 루덴도르프에게 제국의회 다수파인 사회민주당, 가톨릭중앙당, 진보당을 내각에 입각시켜 민간 정부를 수립해야 우드로 윌슨이 휴전 제안에 동의할 것이라고 제안했고, 루덴도르프는 이에 동의했다.[181]
루덴도르프는 패전 책임을 문민 정부에 씌우고, 독일 군부를 지키고자 했다. 독일군은 계속 승리하고 있었는데 좌익이 독일군을 배신하고 항복했다는 이른바 "등 뒤의 비수 전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18년 9월 29일은 독일에서 "위로부터 혁명"이 시작된 날이 되었다. 루덴도르프는 전쟁이 끝난 후 군부가 문민정부를 경질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182] 그는 이 계획을 9월 27일에 세웠고, 다음 날 힌덴부르크와 제국 수상 및 외무대신으로부터 동의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황제로부터 윤허도 받아냈다.[182]
프로이센 왕국은 전쟁 전의 왕권을 회복하고[183] 빌헬름 2세 황제가 퇴임할 때까지 왕권을 유지했다. 루덴도르프는 미국 정부와 직접 협상을 시도했고, 새로 수립할 문민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더 나은 평화 조건을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다.[184] 1918년 10월 1일, 루덴도르프는 헤르틀링을 사임시키고 바덴의 막스 공에게 조각을 위임했다. 막스 공은 자유주의 성향의 귀족이었고, 루덴도르프에게 계속 반대했던 사람이었다. 막스 공은 휴전 협상안에 반대했으나 1918년 10월 4일, 결국 루덴도르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185] 막스 대공은 내각에 독일 사회민주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영입하고 10월 5일부터 새 정부를 출범시켰다.[185]
그러나 1918년 10월 초, 새 정부의 협상 내용을 알고 루덴도르프는 좌절했다. 10월 2일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통첩을 막스 공에게 보냈고, 막스 공은 미국에 휴전 협상을 제의했다. 그러나 우드로 윌슨은 "독일의 군사 권력자나 군국주의 독재자와 교섭해야 한다면 독일과 강화 조건에 관해 토의할 수 없으며 무조건 항복해야 한다"고 회답했다[186]. 빌헬름 2세 황제의 퇴위 요구였다. 윌슨은 10월 8일부터 23일까지 세 번 최후 통첩을 보냈는데, 세 번째는 황제 퇴위를 거의 분명하게 요구했다[187] 독일 국내 여론도 분열되었고, 승전 선전에만 익숙했던 시민들은 갑작스러운 휴전 협상 소식에 "배반당했다"라며 울분을 토했다[187]
루덴도르프는 한 달 전과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했다. 명예로운 평화를 기대할 수 없었던 그는 새 민간 정부를 다시 장악하기 위해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굴욕스러운 휴전 협정 내용을 비난했다. 그는 10월 중순에 방어에 유리한 겨울까지 전선을 유지해야 한다고 결정했지만, 민간 정부는 협상을 계속했다.
문민 정부는 패전의 책임을 쓰기로 결심했다. 루덴도르프가 의도했던 바대로 군부로부터 고발을 당할 수 있었다.[188]. 루덴도르프는 이러한 문민 정부에 등을 돌려 윌슨이 마지막 통첩을 보낸 다음 날인 10월 24일 계속 저항할 것임을 군명으로 밝혔다[188]. 상황은 루덴도르프와 막스 대공의 문민 정부 사이 대결로 비화되었다. 10월 17일 내각 회의에서 막스 공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 루덴도르프는 사람을 신용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 루덴도르프 장군은 휴전 제안과 세계와 독일에 대한 그 파괴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적의 공세와 독일군의 사기 악화의 책임을 휴전 교섭에 뒤집어씌웠다.[188]
막스 공은 황제에게 자신과 루덴도르프 두 사람 중에서 1명을 선택하라고 요구했다. 황제는 막스 공을 선택했다. 루덴도르프는 10월 26일, 황제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승리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자 루덴도르프는 더 이상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1918년 9월 29일 이전에는 황제와 충돌했을 때 루덴도르프는 사직서로 황제를 협박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 그래, 그럼 그만두게" 같은 대답을 듣는 처지가 되었다.[188] 힌덴부르크도 사직할 것이라고 루덴도르프는 얘기했지만, 황제와 힌덴부르크의 생각은 달랐다. 황제는 힌덴부르크에게 "유임하라"고 얘기했고, 힌덴부르크는 이를 받아들였다. 루덴도르프는 힌덴부르크가 자신을 버렸다고 비난했다. 참모본부로 돌아갈때 힌덴부르크가 루덴도르프에게 같이 차를 탈 것을 권했지만, 루덴도르프는 이를 거절했다.[189]
꽁피에뉴 숲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루덴도르프는 독일을 떠나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3. 3. 전쟁에 대한 회고와 미래 전망
루덴도르프는 망명 생활 동안 독일군의 전쟁 수행에 관한 많은 책과 글을 썼다. 그의 저술은 등 뒤의 비수 전설이라는 신화의 기초가 되었는데, 이는 루덴도르프 자신이 군사적 패배의 주된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었다.[63] 그는 독일이 방어전을 수행했으며, 빌헬름 2세 황제가 적절한 선전 활동을 조직하거나 효과적인 지도력을 제공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63]루덴도르프는 사회민주당과 좌파 세력을 극도로 혐오했으며, 베르사이유 조약의 굴욕적인 조항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돌렸다. 이는 사실과 다른 책임 전가였다. 그는 좌파 세력이 애국심보다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하여 전쟁 수행 노력을 저버렸다고 비난했다. 또한, 전쟁 말기의 파업과 전선 붕괴 이전에 후방이 먼저 무너진 것에 대해 경악했다. 그는 독일 국민 대다수가 전쟁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했으며, 삼국협상이 전쟁을 일으켜 독일을 완전히 해체하려 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혁명으로 인해 독일이 국제 사회에서 버림받았고, 20년 안에 독일 국민이 혁명을 지지한 정당들을 저주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미국의 참전을 야기할 것이 분명했음에도, 루덴도르프는 이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그는 미국의 군사력이 약하다고 판단하여, 저명한 화학자 발터 네른스트의 경고를 무시하고 회의를 중단시켰다.[35] 결국,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1917년 2월 최고사령부(OHL)의 강력한 지지 하에 시작되었고, 이는 독일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루덴도르프는 블라디미르 레닌을 포함한 30여 명의 혁명가들이 러시아로 돌아가는 것을 도왔다.[36] 그는 볼셰비키들을 독일을 통해 밀봉 열차로 보내 스웨덴을 거쳐 러시아로 가도록 주선했다.[38]
1917년 봄, 독일 제국 의회는 합병이나 배상금 없이 평화를 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최고사령부(OHL)는 이를 무시했고, 게오르크 미하엘리스 수상이 결의안을 무력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재정 지원을 계속 승인했다.
니콜라이 2세가 축출된 후, 러시아 임시 정부는 케렌스키 공세를 시작했지만 실패했다. 독일군은 유글라 전투에서 승리하며 동부 전선을 유리하게 이끌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러시아에 막대한 영토 손실을 강요했다. 루덴도르프는 독일인을 "주인종"으로 여기고[43], 승리 후 발트 국가와 엘자스-로렌에 전직 군인들을 정착시켜 발트인과 프랑스인으로부터 압수한 재산을 인수할 계획이었다.[44]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 수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최고군사령부(OHL)는 미카엘 작전을 시작으로 영국군을 몰아내기 위한 일련의 공격을 계획했다. 독일군은 초반에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플랑드르와 Chemin des Dames프랑스어에서 공격을 이어갔지만, 병력과 사기가 점차 약화되었다.
1918년 7월, 프랑스와 미국 연합군의 반격으로 독일군은 패배를 직감하게 되었다. 루덴도르프는 아미앵 전투에서 독일군이 기습을 당하고 항복하는 것을 보며 "독일군 역사상의 암흑의 날"이라고 표현했다.[54]
루덴도르프는 점점 더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의사 Oberstabarztde 호흐하이머의 도움을 받아 전투 피로 증상에서 회복되었다.
전황이 절망적으로 변하자, 루덴도르프는 1918년 9월 28일 힌덴부르크와 함께 독일 정부에 휴전 협상을 촉구하는 통첩을 보냈다.[122][123][124] 이는 패전을 회피하고 그 책임을 문민 정부에 전가하려는 의도였다.[125]
막시밀리안 폰 바덴 수상은 미국과의 휴전 협상을 진행했지만, 미국의 요구는 점점 더 강경해졌다.[126] 루덴도르프는 항전을 주장하며 휴전에 반대했지만, 결국 1918년 10월 26일 참모총장직에서 사임했다.[128][129] 그는 스웨덴으로 망명하여 『전쟁 회고록』(Kriegserinnerungen)을 저술했다.
4. 정치 경력 - 히틀러의 협력자
루덴도르프는 1920년 독일로 돌아와 짧은 기간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가 군부에 의해 우익 정권이 다시 들어선 바이에른에 머물렀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루덴도르프와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같은 유명 장군들을 중국의 국민혁명군 개혁을 위해 파견하려 했으나,[191] 베르사유 조약의 제약과 유명 장군들을 용병으로 보낸다는 이미지 문제로 취소되었다. 루덴도르프는 정치인들을 혐오했고, 그들 대부분이 애국심이 부족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정치 철학과 전쟁관 때문에 극우 성향을 띠게 되었고, 나치당과 아돌프 히틀러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1923년 11월 9일 히틀러가 일으킨 맥주홀 봉기에 루덴도르프도 참여했다.[64] 이 봉기는 실패했지만, 루덴도르프는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24년, 그는 민족사회주의자 자유운동(NSFB)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1928년까지 활동했다.[192] 1925년에는 전 상관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 맞서[193]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285,793표를 얻는 데 그쳤다. 루덴도르프는 봉기 때문에 명성에 타격을 입었지만, 전쟁 영웅 이미지를 활용하여 소극적으로 선거운동을 했다.
1919년 2월 뮌헨으로 귀국한 후, 루덴도르프는 주로 반바이마르 공화국 정치 활동에 전념하여 우익·보수 세력의 지지를 얻었다. 1919년 11월, 힌덴부르크가 의회 조사 위원회에서 패전 책임을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돌격대의 칼빵(Dolchstoßlegende)"으로 돌린 것을 계기로, 독일 혁명을 일으킨 사회주의자들에게 패전 책임을 전가하는 여론이 보수파·우익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루덴도르프 또한 런던 주재 영국 무관 닐 맬컴 소장과의 회담에서, 과장된 언변으로 대전 중 최고 사령부가 항상 문관 정부의 방해를 받았고, 혁명이 독일군을 배신했다고 말했다. 이를 들은 맬컴 장군이 "각하, 귀하는 배후에서 찔렸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라고 묻자, 루덴도르프는 "배후에서 찔렸다고요"라고 반복하며,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뒤에서 찔린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루덴도르프는 "유대인의 배신"을 언급하기 시작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유대인은 전쟁 이득자이며, 독일인 애국자들은 독일 민족이 유대 민족에 의해 팔렸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120] 이러한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의 발언은 독일 국가 인민당과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 등 우익 정당에 영향을 미쳤다.
1920년 초, 루덴도르프는 의용군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동하여 1920년 3월 카프 폭동에 참가했다.[132][133] 폭동 세력인 에어하르트 해병 여단은 독일 사회민주당(SPD) 정권을 몰아내고 베를린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루덴도르프가 총리가 될 뻔했지만, 주저했기 때문에 결국 볼프강 카프가 총리에 취임했다.[134] 그러나 독일 사회민주당이 주도하는 총파업으로 카프 폭동은 실패로 끝났다.[135] 한편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카프 폭동에 자극받은 구스타프 폰 카르가 요하네스 호프만 사회민주당 정권을 타도하고 우익 정권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루덴도르프와 에어하르트 해병 여단 대원 대부분은 폭동 실패 후 뮌헨으로 도망쳤다.[136] 이후 그들은 뮌헨의 우익 정당 나치당(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과 급속히 가까워졌다.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은 1924년 5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32석을 획득했고, 루덴도르프도 국회의원이 되었다.[151] 1924년 12월 20일 히틀러가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출소했다. 히틀러는 나치당 금지 명령을 해제받기 위해 가톨릭 신자인 하인리히 헬트 바이에른 주총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반가톨릭적인 루덴도르프와 독일 민족 자유당과의 연립을 해소했다. 루덴도르프와 독일 민족 자유당은 1925년 2월 12일에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에서 이탈했다.[152]
이후 루덴도르프는 독일 민족 자유당의 지도에 임하면서 "프론트반" 내의 루덴도르프파를 1925년 9월에 조직하여, 그 지도에 임했다.[153] 이 조직에서 루덴도르프는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의사 마틸데 폰 케姆니츠 박사의 영향을 받아 유대인, 가톨릭, 프리메이슨의 "세계 지배 음모"를 비판하는 음모론적인 언론 활동을 하게 되었다.[154]
루덴도르프는 1925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득표 수가 최저였고 낙선했으며,[120] 이 참패로 사실상 정치 생명을 마감했다.[153] 지지자들도 루덴도르프를 버리고 나치당으로 이동했다.[155] 루덴도르프는 대통령이 된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독일의 배신자로 여겼고, 히틀러도 배신자로 비판했다.[120] 히틀러와 루덴도르프의 관계는 악화 일변도였고, 히틀러는 1927년 레겐스부르크 집회에서 "루덴도르프야말로 프리메이슨이다"라고 공언했다.[156] 나치당의 정권 장악까지 루덴도르프와 히틀러가 교류하는 일은 없었다. 나치당은 그의 기이한 음모론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157]
5. 말년
1928년 이후 은퇴한 루덴도르프는 나치스와 거리를 두었다. 그는 히틀러를 교활한 정치꾼으로 여겼으며, 히틀러가 독일 수상으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보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194][75]
: "각하께서 히틀러를 제국 수상으로 임명함으로써, 조국 독일을 가장 위험한 시대로 넘기셨습니다. 저는 이 악마가 우리의 조국을 심연으로 빠뜨리고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미래 세대는 각하께서 무덤을 파셨다고 저주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보의 원문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내용을 언급한 1차 사료 중 하나는 한스 프랑크의 회고록이며, 루덴도르프의 동료였던 빌헬름 브로이커 대위도 1953년 회고록에서 전보의 존재를 언급했다.[195] 일부 역사가들은 이 전문이 위조되었다고 생각한다.[77][158]
말년에 루덴도르프는 타넨베르크 연맹을 이끌었고, 두 번째 부인 마틸데 폰 켐니츠와 별거하며, 기독교, 예수회, 가톨릭, 유대교, 프리메이슨을 세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마틸데와 함께 "신의 지식을 위한 모임"(Bund für Gotteserkenntnis|신의 지식을 위한 모임de)이라는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73] 이 단체는 현재까지 남아있다.
뮌헨 봉기 이후 히틀러를 멀리했던 루덴도르프는 1935년 히틀러의 비공식 방문에서 원수 제안을 받았으나, "장군은 전장에서 임명되는 것이지 평화로운 생일 파티에서 임명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거절했다.[78][165][166]
1935년에는 『총력전』을 저술하여 총력전의 필연성을 주장했다.
1937년 뮌헨에서 간암으로 사망했으며, 투칭의 신설묘지에 안장되었다. 히틀러는 루덴도르프의 바람과 달리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추모사는 하지 않았다.[80][156][159][167]
6. 저서
- ''Meine Kriegserinnerungen 1914-1918''|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19년). 베를린: Mittler & Sohn. (1936년 재출판)
- * 프레드릭 애플비 홀트(Frederic Appleby Holt) 번역 영어판: ''My War Memories 1914–1918'', 런던: 허친슨 & Co. ([https://archive.org/details/mywarmemories19101lude/ vol. I], [https://archive.org/details/in.ernet.dli.2015.45378 vol. II]; 미국판: ''Ludendorff's Own Story'', 하퍼 & 브라더스)
- (편집) ''Urkunden der Obersten Heeresleitung über ihre Tätigkeit 1916–18''|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20년). 베를린: E. S. 미틀러
- * F.A. 홀트 번역 영어판: ''The General Staff and its Problems: The History of the Relations between the High Command and the German Imperial Government as Revealed by Official Documents'', 런던: 허친슨 & 존, 1920 ([https://archive.org/details/generalstaffitsp01lude vol. I], [https://archive.org/details/generalstaffitsp02lude/ vol. II])[84]
- ''Kriegführung und Politik''|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22년). 베를린: E. S. Mittler & Sohn.
- ''Vernichtung der Freimaurerei durch Enthüllung ihrer Geheimnisse''|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27년). 뮌헨: Ludendorffs Verlag.
- ''Kriegshetze und Völkermorden in den letzten 150 Jahren''|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28년). 뮌헨: Ludendorffs Verlag.
- 마틸데 루덴도르프와 공저: ''Das Geheimnis der Jesuitenmacht und ihr Ende''|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29년). 뮌헨: Ludendorffs Verlag.
- ''Weltkrieg droht auf deutschem Boden''|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30년). 뮌헨: Ludendorffs Verlag.
- ''Mein militärischer Werdegang. Blätter der Erinnerung an unser stolzes Heer''|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33년). 뮌헨: Ludendorffs Verlag.
- ''Eine Auswahl aus den militärischen Schriften''|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35년). 라이프치히: Quelle & Meyer.
- ''Der totale Krieg''|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35년). 뮌헨: Ludendorffs Verlag.
- * 이토 토모오 역·해설 『루덴도르프 총력전』원서방, 2015년.
- ''Mitarbeiter''와 공저: ''Mathilde Ludendorff – ihr Werk und Wirken''|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37년). 뮌헨: Ludendorffs Verlag.
- ''Auf dem Weg zur Feldherrnhalle. Lebenserinnerungen an die Zeit des 9. November 1923''|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37년). 뮌헨: Ludendorffs Verlag.
- 마틸데 루덴도르프와 공저: ''Die Judenmacht. Ihr Wesen und Ende''|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39년). 뮌헨: Ludendorffs Verlag.
- ''Vom Feldherrn zum Weltrevolutionär und Wegbereiter deutscher Volksschöpfung''|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 * ''Band 1: Meine Lebenserinnerungen von 1919–1925''|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2.–16. Tausend Ludendorffs Verlag, München 1941.
- * ''Band 2: Franz Freiherr Karg von Bebenburg (Hrsg.): Meine Lebenserinnerungen von 1926–1933''|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3. Auflage Verlag Hohe Warte, Stuttgart 1951.
- * ''Band 3: Franz Freiherr Karg von Bebenburg (Hrsg.): Meine Lebenserinnerungen von 1933–1937''|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Verlag Hohe Warte, Stuttgart 1955.
- ''Die Revolution von oben. Das Kriegsende und die Vorgänge beim Waffenstillstand. Zwei Vorträge''|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26년). 로르히: Karl Rohm.
- ''Wie der Weltkrieg 1914 „gemacht“ wurde''|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34년). 뮌헨: Völkischer Verlag.
- ''Gefesselte Arbeitskraft''|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31년). 뮌헨: Ludendorffs Verlag.
- ''Der Rettungsweg; Weg mit Goldwährung und Börse''|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31년). 함부르크: Ludendorff-Buchhandlung.
- ''Meine Kampfziele''|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32년). 뮌헨: Ludendorffs Verlag.
- ''Schändliche Geheimnisse der Hochgrade''|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32년). 뮌헨: Ludendorffs Verlag.
- 마틸데 루덴도르프와 공저: ''Weihnachten im Lichte der Rasseerkenntnis''|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33년). 뮌헨: Ludendorffs Verlag.
- ''Das Marne-Drama. Der Fall Moltke-Hentsch''|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34년). 뮌헨: Ludendorffs Verlag.
- ''Des Volkes Schicksal in christlichen Bildwerken''|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34년). 뮌헨: Ludendorffs Ver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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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rne Kriegsgeschichte“ vor dem Gericht des Weltkrieges''|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34년). 뮌헨: Ludendorffs Ver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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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anzösische Fälschung meiner Denkschrift von 1912 über den drohenden Krieg''|한국어 발음 표기|한국어 번역de (1935년). 뮌헨: Ludendorffs Ver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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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25년 선거 | 독일의 대통령 | 2대 | 독일 민족자유당 | 1.1% | 285,793표 | 7위 | 낙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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